24 절후중 20번째 절후인 소설(小雪)이 코 앞으로 다가 섰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신묘년(辛卯年)도 끝자락을 향해서 치달리고 있다.
머지않아 신묘년(辛卯年)도 삶의 무거운 짐을 임진년(壬辰年)에게 떠 넘기고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려고 부산스럽게 떠날 차비를 서두르고 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들녘에 풍성했던 오곡들이 농부의 집으로 이사를 온듯 농부의 집이가을로 가득 넘쳐난다.  
대문에는 잡신을 쫓는 가시가 다닥다닥 붙은 엄나무가 파수꾼인양 걸려있고높다란 추녀기둥에는 종자로 쓰려는지 말벌집 같은 옥수수타래가 몸매를 자랑하듯 홀라당 옷을 벗고는 쥐들의 애간장을 녹일듯 매달려 있고 그 옆으로는 장군을 호위하는 병사처럼 조 이삭과 수수 이삭이 참수를 당한듯 목이 댕강 잘려 효수를 당한듯 걸려있다.
나락은 창고에 돌담울 쌓듯 쌓여있고 그 옆으로는 옥수수와 콩가마니가 왕을 호위하는 신하처럼 올망졸망 머리를 조아리고 들깻와 참깨 고추 수수 호박은 보물인양 시렁에 덩그런히 올라 앉아 으시대고대마도에서 시집을 온 고구마는 동남아에서 시집온 아낙네들처럼 갑옷을 입듯 솜이불을두르고도 고추 같이 추위에 넌덜머리가 난다면서 오들오들 떨며 쳇머리를 흔들어 댄다.    
창고 맞은편 헛간에는 윷가치처럼 쪼개진 수북하게 쌓인 장작은  동장군을 막으려는듯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뭉치면 산다는듯 동료를 끌어 안고 헛간을 지키고 있고 시렁에는 몸받쳐 일을한 농기구들이 고장난 벽시계처럼 걸려서 꼼짝도 하질 않고 동면에 빠져있고 뒷뜰 양지쪽 담벼락 밑에는 가지만 남은 늙은 살구나무가 머지않아 펑펑 쏟아질 눈이불을 기다리며 명년 봄 꽃피고 새우는 봄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살구나무 밑 장독대에는 아들 손자 며느리 삼대가 오순도순 모여 살듯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올망졸망 모여앉아 짧은 초겨울 햇살을 쪼이면서 두런두런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장독대 옆에는 입동 날 새로 지은 김칫광이 만삭이된 산모처럼 불쓱 배를 내밀고는 음천하게 누워서 휴식을 취하고 있고 미친여인의 엉덩짝만한 앞 마당 꽃밭에는 서리를 맞은 코스모스와 맨드라미가 갈대처럼  찬바람에 백발을 흩날리면서 지난 시절이 그리운지 사색에 빠져있고 게으른 국화는늦둥이처럼 초가을에 꽃을 피워 초겨울를 머리에 이고는 꽃씨가 영글지 않았는지 가는 가을을 붙잡으려는지 환한 웃음을 머금고는 정신이 어질트릴 만큼 그윽한 향기를 흩날리며 가을 옷자락에 매달리건만 무정한 가을은 국향에 취한듯 콧구멍을 벌렁거리면서도 뒤도 한 번 돌아보질 않고 초겨울에 밀려서 도망치듯 저 만큼 가고 있다.   
소설(小雪)이 코 앞으로 다가섰으니 머지않아 삭풍도 나뭇가지끝에서 선무당처럼 춤을 추고  떡가루를 빻아 놓은듯 함박눈도 내리겠지......
구운 밤!
눈 내리는 겨울밤 화롯불에 구워 먹는 군밤은 둘이 먹다가 한사람이 죽어도 모를 참으로 꿀맛이다.  
겨울밤 군것질 거리로는 군밤만한 것이 또 어디 있단말인가?
겨울밤 군밤 생각에 입가득 침이 고여서 밤을 사러갔다.
지난 여름 긴 장마로 밤 값이 금 값이다.
밤을 한 말 사들고는 밤집을 나서는데 젊은시절 첫 눈 내리던날 밤 친구네 사랑방에 모여서 화롯불에 알밤을 구워 먹으려다 화로를 뒤집어 엎는바람에 군밤은 맛도 못  보고 하마터면 집에 불이 날뻔했던 웃지 못할 옛 일이 아련하게 떠 오르면서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은 어느새 옛 날로 달려 간다.  
그 날은 첫 눈이 내리려고 그랬는지 아침나절 구름도 한 점 없이 맑던 하늘에 갑자기 잿빛 구름이 몰려오더니 일순 하늘을 뒤덮어 한 낮인데도 해가진듯 사방이 어스레해지면서 잿빛하늘이 낮게 내려 앉더니 먼 곳의 기적 소리가 가까히 들려 온다. 
멧새들도 눈이 내릴 것을 아는지 손에 잡힐듯 낮게 날아서 먹이를 먹느라고 날갯짓이 분주하고 온 동네 개들도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멍멍거리고 실없이 짓어댄다. 
무릎 관절이 좋지 않으신 재식이 할머니는 날이 궂을라치면 관상대보다도 더 정확하게 무릎이 아프다고 통증을 호소하시는데 오늘은 마실을 가시는데 평상시보다두 더 절룩거리시는 모습을 뵈니 해지기전에 눈이 내릴 것 같다.
한 낮이 지나고 저녁 새참 때가 되자 산에서 살던 굴뚝새들이 갑자기 떼지어 굴뚝으로 날아 든다.
굴뚝새도 천기를 아는 모양이다.   
하늘이 점점 더 어스레해지더니 갑자기 얼굴이 차갑다는 느낌이 든다.
얼른 하늘을 올려다 보니 봄바람에 복사꽃잎이 날리듯 눈이 너풀너풀 춤을추면서 내린다.  
눈이 내리자 마을 꼬마들은 신바람이 난듯 거리로 밖으로 뛰쳐나와 천둥에 놀란 개 뛰듯 뛰고 개들도 아이들에게 뒤질세라 길길이 날뛴다. 
먹이를 먹던 멧새들도 서둘러 보금자리를 날아가는지 날래짓이 바쁘고 굴뚝새도 합창하듯 조잘거려 집안이 새장인양 굴뚝새소리로 가득하다.
쥐들도 쥐구멍으로 눈이 날아들자 서둘러 쥐굴속으로 찾아 든다.
손을 펼치니 그림 같은 여섯모 결정체의 예쁜 함박눈이 싸락싸락 노래를 부르면서 사뿐히 손바닥에 내려 앉더니 손이 난로인양 금새 물방울로 변해버린다.
눈!
수중기가 얼어서 내리는 것이 눈이 아닌가?
얼지 않고 내리면 비가 되고 모여서 내리면 장대비고 얼어서 내리면 눈이 되고 뭉쳐서 내리면 우박이 된다.
자연은 도깨비 방망이인가 참으로 신기한 재주를 지녔다.
너풀너풀 춤추며 내리기 시작하던 눈이 금새 함박눈으로 변해서 펑펑 마구 쏟아지자 온세상 천지가 금세 솜이불을 덮은듯 하얗게 변해 간다.
산에도 들에도 지붕에도 장독대에도 살구나무 가지에도 빨랫줄에도 국화꽃송이에도 어느 한곳 가리지 않고 골고루 내려서 눈꽃이 피어 난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도 눈은 그치지를 않고 계속해서 펑펑 마구 쏟아진다.
일찍이 저녁을 먹고는 잠자리에 들었건만 눈이 내려서 마음이 들떴는지 잠은 오질 않고 눈이 자꾸만 창밖으로 쫓아간다.
쉬 잠이 올 것 같지 않아서 쏟아지는 눈을 맞으면서 밤마실을 나섰다. 
골목길을 돌아서 상길이네 집쪽으로 가는데 갑자기 작년에 서울로 이사 간 순희네 집 앞에서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춰지면서 순희가 보고파진다.     
어릴 때 소꼽놀이할 때는 내 색시가 되겠다고 손가락을 걸면서 맹세까지 했는데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살길이 막막해서 동생과 함께 서울에 계신 작은아버지네집으로 이사를 갔다. 
떠나는 날 울며 불며 자주 소식을 전하겠다면서 떠났는데 어찌된 일인지 일년이 다가도록 편지도 한장 없이 감감무소식이다.
삶이 고달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더니 그새 벌써 나를 잊었는지?
그도 아니라면 혹시 몸이라도 아푼 것은 아닐까 하는 오만가지 생각이 든다.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 때문인지 오늘따라 순희가 무척이나 보고 싶다.
그러고 보면 눈은 그리운사람을 생각나게 하는 마력도 지니고 있는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