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님, 소녀, 금봉이옵니다. 어찌 아니 오시는지요? 소녀, 서방님을 기다리다 지쳐 병이 들었나이다. 소녀, 이등령에 올라 이제나 저제나 서방님이 오실 날만 기다리다 이제 모든 것을 놓았습니다. 서방님, 보고 싶어요. 그러나 서방님께서 무슨 말 못할 사연이 있으셔서 못 오시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서방님, 제 모습이 보이시죠? 이 배 좀 보세요. 서방님의 아기가 무럭무럭 크고 있던 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저승에 들어 우리 아기와 함께 살아 갈 거예요. 먼 훗날 서방님께서 오시면 우리 아가와 마중 나갈게요. 소녀, 이승에서 못 다한 사랑 저승에 가거든 꼭 이루겠나이다. 서방님, 소녀 먼저 가오니 내내 강건하사옵고 꼭 큰 뜻을 이루소서. 혹시라도 고향가시는 길에 이등령을 잘 살펴보시어요. 소녀, 이등령에서 서방님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이제 소녀, 서방님께 하직인사 올립니다. 절 받으세요. 서방님, 으흐흐흐 흐흑……."
 "헉, 그, 금봉아, 금봉아, 안 돼. 안 돼. 나를 두고 어딜 간단 말이야? 안 돼. 안 돼. 금봉아, 나를 두고 어디를 간다는 거야. 거기 서. 안 돼. 안 돼……." 머리를 산발하고 소복(素服)을 입은 금봉이가 박달 도령에게 찾아와 슬픈 얼굴로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었다. 술에 취해 잠들어 있던 박달 도령은 손을 허공으로 휘저으면서 금봉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서방님, 서방님, 주무시다 말고 웬 잠꼬대를 그리하세요? 어머나, 이 땀 좀 봐. 악몽을 꾸셨나 봐요?” 박달 도령이 지르는 소리를 듣고 아지가 방으로 뛰어 들었다.
 '아아, 이상한 일이로다. 금봉이가 머리를 풀고 소복을 입은 채 나타나다니 분명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단 말인가?'
 "아지, 지금이 어느 때요?"
 "서방님, 한밤중이에요. 그런데 주무시면서 금봉이 이름을 왜 부르셨어요? 그것도 아주 애절하게요."
 "내가 그랬소?" 아지 역시 분명 금봉이에게 무슨 별고가 생긴 것을 직감으로 알고 박달이의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하였다.
 “서방님, 오랜만에 술을 드셔서 그런가 봐요? 한 밤중이니 더 주무시고 내일 새벽에 일찍 일어나 다시 공부하세요. 밤이 너무 늦었으니 오늘은 그냥 주무세요. 전 제 방으로 갈게요. 서방님, 내일 새벽에 깨워드릴게요. 맑은 정신으로 공부하세요.” 아지가 방에서 나가자 박달은 밖으로 나왔다. 마침 그믐달이 막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는데 달 속에 금봉이 울면서 앉아 있었다.
 "금봉이, 이 못난 사람을 용서하구려. 그리고 무슨 일이 있는 게요? 어째서 소복차림으로 있는 게요? 그 동안 수백 수천 번도 더 그대를 보고 싶어 벌말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과거에 낙방하여 돌아갈 수 없었소. 과거에 입격하여 금의환향해야 하는 이 몸은 절대로 그냥 돌아갈 수 없었소. 용서하오." 그믐달이 쓸쓸히 서산으로 넘어가 버렸다. 세상이 온통 캄캄한 어둠속으로 묻혀버렸다. 박달은 금봉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하였다.
 ‘아아, 금봉이가 소복을 하고 꿈에 나타나다니. 혹시, 혹시 금봉이가? 아냐, 그럴 리 없어. 그런데 금봉이 배가 남산만 했어. 그렇다면 금봉이가 아기를? 아아, 안 돼 는데. 처녀가 아기를 가졌다면 동네에서 내 쫓기거나 망신을 당할 텐데. 이일을 어쩌나? 현몽(現夢)하였으니 그냥 있을 수도 없고.’ 박달은 이 생각 저 생각하면서 뜬 눈으로 밤을 재웠다. 책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꿈속에 나타난 금봉이의 모습이 너무나 생생하여 마치 방금 앞에 앉아 대화를 나눈 것 같았다.
 ‘어쩌나? 분명 금봉이에게 변고가 생긴 것이 분명한데......, 그래. 과거보다 사람 목숨이 더 중요해. 꿈은 꿈일 뿐이야. 금봉이가 나를 애타게 찾고 있는 것이 분명해. 과거는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어. 내가 벌말에 가지 않고 이곳에서 과거 준비를 한다고 하여도 금봉이가 현몽한 이상 제대로 공부가 되지 않을 테고. 그래,  빨리 벌말로 가야해.’ 박달은 꿈속에 나타난 금봉이의 자신에게 손짓하는 모습이 너무 애절하고 빨리 가보지 않으면 천벌이 내릴 것 같았다.
 ‘아깝지만, 이번 별시는 포기하는 수밖에 없어. 금봉이의 마음을 안정시켜 놓고 다시 올라와서 공부해도 될 거야. 그런데, 그런데 왜 금봉이가 저승 이야기를 하고  하직 인사를 하였지? 아무래도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은데 도무지 그 일이 무엇일까?’ 박달은 괴나리봇짐을 챙기고 난 뒤 아지에게 편지를 썼다.
 
   꿀맛을 잘 알지 못하는 나비 한 마리
   어쩌다 갈 길을 잃고
   한 여름 꽃에 잠시 앉았다 가오
   그대가 나비 였고, 나 역시 잠시나마 꽃이었었소
   천 길 낭떠러지에 절벽에 핀
   화사한 꽃에 앉아 편히 꿀을 맛 본 벌은
   이제 창공(蒼空)을 향해
   자유로운 날갯짓을 마음껏 펼치려 하오
   꿀맛을 모르는 나비 한 마리
   이제 첫 입맞춤을 그리며 훨훨 날고자 하오
 

                                    朴達

 
 박달 도령은 알쏭달쏭한 시 한 수를 써놓고 마포나루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