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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 보기보다는 마음 씀씀이가 웬만한 사내보다 넓구려. 고맙소.”
“서방님, 별 말씀을요? 모두가 서방님의 홍복(弘報)이지요. 저는 단지 뒤에서 서방님의 합격을 위해 품을 좀 팔았을 뿐이어요. 이번에 꼭, 꼭 합격하셔야 해요. 먼저는 운대가 안 맞았지만 이번에는 틀림없이 합격하실 거예요. 틀림없어요.”
“아지가 그리 말해주니 힘이 나는 구려. 자, 어서 마시고 나 한 잔 더 주구려.”
“서방님, 한 잔만 드신다고 하시고?”
“난, 원래 술에 강한 체질이라 술 서너 잔은 끄떡없어요. 괜찮소.”
“그럼, 딱 두 잔만 더 드시고 공부하셔요.”
“알겠소. 그리고 내 그동안 나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뒷바라지 해 준 아지의 뜻에 보답을 할 참이오. 합격하였다고 날름 다른 곳으로 날아가지 않을 테니 걱정 마오.”
“서, 서방님, 정말이지요? 정말로 방금하신 말씀대로 하실 거죠?”
“사내대장부가 일구이언(一口二言)하는 거 보셨소?”
“서방님, 고마워요. 정말로 고마워요.” 아지는 박달 도령의 말뜻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감격의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소주 한 주전자 금방 비워지고 말았다. 박달 도령도 서너 잔 정도는 무난하다고 하였으나 소주는 탁주보다 두 배 이상 독했기 때문에 금방 취하고 말았다.
“아아, 이러면 안 되는데. 아팠던 머리가 더 아프니 어쩐다? 에라, 한 잠 자고 나면 깨겠지.”
“서방님, 졸려워 보이세요. 그렇지만 주무시면 안돼요. 공부하셔야 해요.”
“잠시 눈 좀 붙였다가 일어나서 공부할 테니 그대는 나가서 일해요. 내 걱정하지 말고.”
“서방님, 저도 졸려워 죽겠어요. 저는 낮술은 잘 안 하는 편인데 오늘은 이상하게 금방 취하네요. 아마 서방님과 함께 마시니 내가 금방 뜨거워 졌나봐요? 호호 호호호......” 박달 도령은 취기를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들고 말았다. 아지는 음심을 간신히 억누르며 방을 나왔다.
“금봉아, 엄마다. 정신 좀 드니?”
“어, 어머니.”
“그래, 엄마야. 정신 좀 드는 거여?” 금봉이 가늘게 눈을 뜨자 밤새 곁에서 병간호를 하던 금봉이 어머니는 파리하고 앙상한 딸의 손을 잡아 주었다. 금봉이 긴 잠에 깨어 길게 숨을 쉬었다. 금봉이 고모와 이모들 그리고 먼 친척들까지 금봉이 위독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달려와 집안은 방마다 친지들이 들어 있었다.
“어머니.”
“응, 그래. 무슨 할 말이 있는 거니? 그래, 엄마 여기 있으니 어서 말해보렴.”
“바, 박달님 아직 안 오셨지요?”
“에구, 에구, 그 사람이 왔으면 얼마나 좋겠니? 그 무정한 사람이 왔으면 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 있을 텐데......”
‘아아, 이제, 이제 영영 박달 서방님을 볼 수 가 없겠구나. 흐흐 흐흐흐.......’ 금봉이 누워서 눈물을 주르르 흘리자 금봉이 어머니의 가슴이 다시 한 번 무너져 내렸다.
“아이고, 아이고. 그 박달인지 복달인지는 다리가 없는 거여? 손이 없는 거여? 산골 순진한 처녀에게 덜컥 약속을 해 놓고서는 왜 나타나지 않는 거여 그래? 전생에 그 사람하고 무슨 원한을 졌기에 이리도 사람의 애간장을 다 녹인단 말인가. 아이고, 아이고.” 어머니의 탄식 소리를 들으며 금봉이는 흐느끼기 시작하면서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모녀의 흐느낌을 지켜보던 금봉이 고모와 이모들은 이구동성으로 박달을 성토하기 시작하였다.
“그런 작자가 과거에 입격하여 장차 높은 벼슬아치가 된다면 이 조선이라는 나라가 어찌될꼬? 참으로 한탄스럽고 원통하구나.” 금봉이 이모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댔다.
“그 놈이 분명 한양에서 다른 여자 치마폭에 쌓여 과거고 뭐고 다 포기하고 파락호가 된 게 분명해. 삼 개월 후면 온다고 철석같이 약속해 놓고 반년이 다 되도록 안 나타는 거 보면 뻔할 뻔자여. 나쁜놈 같으니라고.” 이번에는 금봉이 큰 고모가 눈물을 찔끔 거리며 욕을 해댔다.
“어머니.”
“그래, 금봉아, 엄마 여기 있다.” 금봉이 간신히 숨을 몰아쉬었다.
“어머니, 저 죽고 나서 박달님이 찾아오시더라도 박대하지 마세요. 못 오시는 이유가 있을 거예요.”
“아이고, 아이고 내 팔자야. 네가 죽긴 왜 죽어? 아이고, 내가 어쩌다 이런 열녀(烈女)를 낳았을꼬.” 금봉이 어머니가 가슴을 치며 신세타령을 하였다.
“금봉아, 그런 말하면 못써. 네가 죽긴 왜 죽겠다는 거야? 조금만 더 기다리면 그 남자, 박달 도령이 올 거야. 그때를 위해서라도 네가 어서 자리에서 일어나야지. 그 사람이 왔는데 네가 없다면 그 사람이 얼마나 황당하겠니? 그러니 어서 정신 차리고 일어나 예전처럼 지내야 해. 금봉아, 이 고모 말 알아들었니?” 이번에는 둘째 고모가 금봉이의 손을 꼭 잡으며 금봉이를 안심시키려고 하였다.
“어머니.”
“그래, 엄마 여기 있다.”
“나 죽은 뒤에 박달님이 오시면 따뜻하게 밥해서 드리세요. 찬밥 드리지 말고 따뜻한 밥해서 드리세요. 흐흐흐흐흐......”
“어이구, 어이구. 죽긴 왜 죽는다는 거야? 네가 자리에서 훌훌 털고 일어나 차려주면 될 거 아니니? 그 사람이 내가 차려주는 밥보다 네가 차려주는 밥을 더 기분 좋게 먹을 거 아니니?”
“어머니.”
“그래, 어서 말해봐.” 금봉이는 점점 가물거리는 의식을 붙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다.
“저, 저, 시집갈 때 준비했던 거. 박달님이 오시거든 모두 주세요.”
“뭐여? 두들겨 패도 시원찮은 판에 네 혼사 품들을 왜 그 사람에게 주라는 거니? 어서 네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 사람과 혼례를 올리면 되잖니?”
“어머니, 죄송해요. 전, 전 이미 틀린 거 같아요.” 금봉이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간간히 몰아쉬는 숨소리에 지켜보는 사람들의 애간장이 다 녹아내리고 있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꺼질 촛불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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