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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 제천 3.1운동 소고(小考)-그날, 4월 17일의 함성 -
안상현 기자  |  ansh5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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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3.20  09: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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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성 범
   전 제천교육장, 세명대 초빙교수

지난 3.1절은 101주년 되는 날이었다. 뜻하지 않았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19로 인해 지난해처럼 행사를 치르지 못했지만 다시 한번 제천 3.1운동을 개략적으로 나마 살펴봄으로서 우리의 자긍심과 자존감을 제고(提高)시키고자 한다.
무릇 3.1운동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의 지도자들이 촉발한 만세운동이다. 운동을 이끌었던 이들은 학생, 농민, 상인 등 서민층이다. 이점에서 봉건 유생들이 처음 주도했던 의병과는  경향이 자못 다르다. 백성이 주인 되는 새로운 정치체제를 꿈꾸는 진보적인 면을 강하게 지닌다는 점에서 척사(斥邪)의 논리로부터 시작한 의병 노선과는 결이 다르다. 그런 점에서 보수적인 성리학 근본주의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지역사회에서 어떻게 3.1운동이 전개되었는지를 검토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지역사회의 민족 운동사에서 3.1운동은 부차적으로만 언급되었다.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지며 전개된 의병 항쟁에 비하여 시기적으로 뒤처지고 관련인물에 관한 이야기도 별로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학문의 장에서도 제천의 3.1운동의 거의 언급한 일이 거의 없다. 1970년에 출간한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에서 제천군의 사례를 간단히 다루었고  제천시지(2004)의 일제강점기의 항일운동 부분에서 박걸순(일제 강점기 항일운동가)이 이를 보완한 일이 있다.  이에 3.1운동 때 제천의 만세운동에 관하여 개략적으로 나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제천에서 만세운동 직전의 상황

고종의 인산(因山)을 계기로 하여 발발한 만세운동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조선군 사령관 우도궁태량(宇都宮太郞)은 폭도들이 만연하는 상황에서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일본군을 재배치하였다.
당시 제천을 포함한 남부지역은 일본군 보병 제40여단의 수비구역이었는데  만세운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병력을 일부 재배치했다.
특히 제천의 만세운동 때 출동한 병력은 일본군 5사단에서 파견한 보병 71연대(중촌면작(中村勉作) 소좌가 지휘하는 701명)였다.
무엇보다 제천에까지 일본군이 출동하게 된 것은 일찍이 항일운동이 작열했던 곳이며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 주목받았던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증명해 주는 것은  2일7일 장이 열리는 제천장에는 강원도 남부. 충북 북부 지역의 물자와 사람이 모여 드는 곳이었고 도내에서 청주장에 이어 두 번째의 규모를 자랑하는 성세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중요도가 높았던 것이다
 
2) 만세운동의 전개

4월 18일 오후, 서울의 경무총장이 본국 일본의 육군대신에게 보낸 전보는 다음과 같이 제천의 만세 시위를 보고했다.
‘17일 , 충북 제천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천 명의 폭민(暴民)이 경찰서에 쇄도하여 폭행하려  하므로 보병 장교 이하 15명이 협력하여 발포하니 사망자가 1명, 부상자가 2명이 발생하였고 3명을 체포하여 해산시켰음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만세 시위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자료는 부족하고 서로 엇갈리는 부분도 있지만 4월 17일 제천 장날에 거사하려는 계획은 일치한다.
이러한 만세운동은 장터 네거리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이 어디쯤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 국편의 테이터베이스에 지목하고 있는 곳이 아님은 분명하다.
오늘날 제천의 중앙시장 동문시장 내토시장이 어져 있는 이 부근은 일찍부터 널리 장터가 형성되어 있었다.
학다리부터 구 동명초등학교 부근까지 용두천을 끼고 광범하게 장터가 형성되어 술집, 잡화점이 기타 상품을  취급하는 가게가 즐비했고 충주, 원주, 신림, 영월, 평창, 단양, 청풍으로부터 몰려드는 장꾼들이 국망이전에 이미 1,500명 수준이었다.
이들을 상대로 한 만세운동은 호응을 얻어 거리를 휩쓸고 다니면서 독립운동 만세를 소리쳤고  그들은 결국 무단통치의 상징이었던 제천경찰서 쪽으로 향했다.
이에 만세시위에 대응하기 위하여 출동한 군경은 발포하기 시작했다. 만세시위를 해도 발포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시위 군중을 설득했던 주동자들은 당황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했다.
그러나 사상자가 발생한 것에 흥분한 시위대는 흩어지지 않고 밤늦도록 만세를 불렀고 외곽으로 만세의 소문이 퍼져나갔다.
19일 새벽 1시에 송학면사무소에 70여명의 주민이 모여들어가 면장에게 함께 만세운동에 동참 할 것을 요구한 사건은 시내에서 벌어진 시위의 연장이었다.

3) 인명 피해 상황

일본군이 기관총까지 준비하여 진압에 나섰으므로 인명피해는 필연의 것이었으나 그 규모에 관하여는 의견이 크게 달라진다.
먼저 박은서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는 전국에서 만세운동으로 피살된 이가 7509명이나 되었다고 하며 제천에서 집계된 숫자는 사망 16명, 부상자 25명, 구속된 이가 41명이라고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이는 연통조직을 통해 임시정부에 들어온 피해사례를 집계한 것이므로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우리지역의 3.1운동의 내용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지역차원에서 4월 17일 만세운동을 전개했다고 하는 것은 우리제천의 자존심이요, 애국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 제천에서 일어났던 4월 17일 그날의 함성인 만세 애국운동을 말이다. 아울러 나라를 위해 순국하신 숭고한 얼을 길이길이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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